[이상국 에세이]결재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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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결재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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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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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땅을 사기로 한 석 이사가 한 달이 가도 연락이 없다.
한창 땅 살 돈 구하러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아내가 반대해서 못 사겠다는 것이다. 옛날 아버지는 어머니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사고팔았다는 데 나는 뭐냐. 이놈의 세상 여자가 판을 친다지만 해도 너무 한다고 개탄이다.

10년 전 땅을 팔아달라고 부탁한 전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땅을 구해 주말 농장으로 농사를 지으려다 퇴직 후 아예 눌러 앉아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농사가 쉬운가. 날마다 땀을 흘려야 하고 일이 숙달되지 않아 농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땅을 팔아 귀경하고 싶은데 아내가 팔을 걷고 반대하는 것이었다.
땅을 매매한다는 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한 건성사를 시키는데도 몇 달 걸리는 수도 있고 1년 또는 영영 못 파는 수도 있는 법인데 이 건은 너무 쉽다 싶었다.

땅을 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수자가 우연히 사무실에 들러 현황을 듣고 솔깃해 현장을 답사해 시세 판단을 하더니 금방 사겠다는 것이었다. 사장에게 연락을 했고 사장과 매수자 앞에서 매매 계약서까지 작성해 놓았다.

그런데 매도자 부인이 어디서 들었는지 주위의 개발이 곧 이루어진다고 급히 쫓아와 반대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완강한지. 남편은 저 여자하고 평생 사는데 질렸다며 어찌나 거센지 꺾을 방법이 없단다. 막말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명색이 신문사 총무부장을 지냈다는 남자가 이 지경이라니.

숙부님이 큰아들을 아주 못마땅해하셨다. 아들이 관공서나 은행 다니는 것을 싫어해 며느리가 도맡았으니,향후 경제권이나 집안 살림은 아들이 아닌 며느리가 장악할 것이다. 그게 싫은 것이다. 아들아, 제발 네가 맡아 해라 해도 사촌은 마이동풍. 이것 저것 아내에게 맡기고 편히 살고 싶단다.

나의 경우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나도 은행, 관공서에 다니는 건 귀찮다. 아내에게 시키고 세상 뒤로 숨고싶다. 결국 세상 모든 여자들이 숨어버린 남편 제치고 백일하에 나섰다. 따라서 여자들 세상이 되었노라 한탄할 일도 아니다. 남자들의 게으름이 일궈낸 살림들이다.

다시 아내로 돌아가서,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아내의 반도 못 따른다. 고추를 따거나 밤을 줍거나 고구마 캐는 것도. 그래서 농약 주는 것, 비료 주는 것 빼곤 모두 아내 몫이다. 그뿐이 아니다. 돈 계산도 나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각종 사안의 판단도 아내의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하는 것은 언제나 불안하고, 자신이 없어 아내의 자문을 받는다. 그 답이 기가 막히게 맞는 데야 할말이 없다.

그렇다고 모두 실토하고 양보했다간 진짜 기승을 부리고 머리 위에 올라앉을 것인데 그걸 어찌 봐. 그래도 내가 더 똑똑한 체하고 살아야 한다. 가끔 아내가 모르는 철학이나 수학, 과학의 전문용어, 아니면 작물생리나 재배원론을 주워 섬기고, 학생 골든 벨은 물론이고 각종퀴즈 문제들도 두드려 맞춰 아내 눈에 엄청 똑똑한 척은 해야 깔보지 못한다.

그래도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아내의 몫이다. 그녀의판단이나 결정이 내 것보다 더 마땅한 걸 어쩌랴. 언제나 아내 앞에 큰 소리 떵떵 치지만 아내의 코치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청맹과니.
내가 이런데, 석 이사나 전 사장, 사촌은 말해 무엇하랴. 누군가 남자나 여자나 경제에 더 밝은 사람이 살림을 맡는 게 좋지 않느냐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

이 시대에 필수요건인 섬세한 감각, 정확한 판단, 민첩한 기민성… 모두 여자들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연히 헛기침이나 완력腕力을 자랑할 때는지났다. 세상이 여자 천하가 된 이유가 있다.
여자들의 길고 긴 인고의 고난을 인정해 주고 뒤안길로 사라진다 해도 그리 억울할 일은 아니다. 유사有史 이래 2018년. 유구한 역사를 남자가 지배해 왔으니 넘겨줄 때도 됐다.

돈 한푼의 지출, 물건 하나 사는 것, 이사를 가야 할곳, 땅 사는 것, 집 파는 것, 회사 운영하는 것, 하다못해 강아지 밥 구하는 것,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여자가 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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