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거저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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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거저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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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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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OO협회장이 회원들을 초대한 술좌석에서 와인을 내놓고 자랑을 했다. 루이 몇 세쯤 되는 와인인 모양이다. 값이 상상을 초월하는 귀하디귀한 술. 그걸 먹으라고 내놓은 줄로 알고 마개를 따 술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회장이 노발대발 냅다 화를 냈다.

“이 사람아, 그게 얼마짜린데. 그걸 따!”

된통 혼이 나고 맛도 못 보고 쫓겨나왔다.

또 다른 이야기. 예전엔 거실 진열장에 가보로 취급하는 귀한 물건들을 진열했다. 그 중 주종을 이루는 것이 술이었다. 와인이나 양주. 귀한 손님, 아무리 좋은 날이라도 구경만 하게 했고 자랑만 했다. 10여 년이 지나, 주인이 죽었다. 귀하고 귀한 비싸고 비싼 술, 한 방울 맛도못 본 채.

어느 학자가 평생 글만 읽었다. 크고 작은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며. 집에 쌓인 것은 책 뿐이었다. 그가 죽고 아들이 상속을 받았는데 아들에겐 무용지물. 물려받은 게 돈이나 부동산도 아니고 쓸데없는 책이라니.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불살라 버린 게 썩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에 기증한다 해도 그게 이름이날 일인가. 이름이 나면 무엇을 할 것이며 명예는 또 무엇인가? 기증 받은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이라 해도 그렇다. 몇십 년 지나면 그게 필요한 자료가 될까. 필요 없는 자료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 작은 USB 하나에 상상을 초월하는 자료가 몽땅 보관되는 세상인데. 진품이기 때문에? 글쎄.

오래 전에 작고한 국민시인 B의 아들인 대학 교수가 아버지의 집이 문화재로 등극될까 봐 미리 집을 허물고 불도저로 싹 밀어버렸다. 교수인 그도 아버지의 집이 문화재로 남아 영원토록 보존되는 것을 싫어했을 이유가 없다. 다만 돈으로 환산되는 부동산이 절실했을 것이다.

내 집엔 귀중품이 하나도 없다. 어려서부터 아까운 것도 모르고 귀한 것도 모르는 태생적 바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중에 길을 잘 못 들어 밤길을 걸었다. 동생주려고 산 캐러멜이 주머니에 있었다. 배가 고파 뜯어 먹기 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누어 준다는 게 너무 많이 나누어 주어 내가 먹을 것이 모자랐다. 너무 적게 먹고 나니 친구들은 아직도 열심히 씹고 삼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야, 그거 너무 많이 줬어. 돌려 줘.”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참고 참았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나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놈들이라그까짓 캐러멜 몇 개 정도야 고마워하지도 않았으며 주었으니 당연히 그냥 먹는 걸로 알고 처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멍청한 놈이었다.

공무원 재직 중이었을 때,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김영란 법도 없고 그냥 좋게 지내던 터라 구정이고 추석 때면 으레 업자로부터 구두 티켓이란 게 들어왔다. 그거나보고 먹으란 건데 어찌 혼자 먹어. 내 아래 직원들이10명이야. 직원들 나누어 주려면 모자라 보험회사에 다니는 아내의 티켓까지 빼앗아 나누어 주었다.

양주가 선물로 오고 간 시절이었다. 그게 들어오면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뚜껑 열어, 찾아온 손님과 대작對酌을 했다. 7촌 조카가 그 술 먹고 48시간을 깨어나지 못해 삼촌이 찾아와 “얘 죽일 작정이냐”고 따져 물어 혼이난 적도 있었고 사우디에서 가져온 코브라 술. 그걸 맛본 동서同壻가 밤새워 퍼마시고 다음 날 몽땅 토하고 간신히 기동한 일도 있었다.

결국 내게 남은 건 엊그제 아들이 사온 참이슬 한 병. 그래도 술 고픈 상관에게 아부성 술 산 건 물론이요. 가끔 동료 직원들 술 사주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다. 당연히 퇴직하고 보니 뿌리 썩은 기둥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공직생활을 되돌리려 해도 때는 늦었다.

오랜만에 처형이 찾아와 횟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같이 근무했던 여직원이 계산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

값이 만만찮은데. 보던 처형과 아내가 하는 말.

“용희(나의 큰아들) 아버지는 인생 참 살았어요.”
“당신은 인생 참 잘 살았다.”
엊그젠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같이 근무했던 직원에게 점심을 사주려고 했더니그가 먼저 계산해 버렸다. 이 정도면 내 집에 비싼 양주 한 병 없어 빈한한 것보다 나은 편일까. 받은 것들은 죽기 전에 갚아야 할 빚인데. 인생 잘 살았다고 해해거릴것 하나 없다.

티베트에 양을 치는 목동이 있었다. 양을 치려면 양을 보호하는 개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훌륭한 개. 족보가 있는 순수 혈통의 개. 수소문한 끝에 이웃 농가에서세상에서 가장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할 뿐 아니라 억대를 호가하는 사자견獅子犬-짱오를 기르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많은 돈을 준비해 찾아가니 천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짱오를 사러 왔노라, 돈 뭉치를 꺼내 놓았다.

주인,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
“우리 티베트의 오랜 전통은 귀한 것은 팔거나 사는것이 아닙니다. 귀한 것은 대가 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냥 데려 가시오. 그리고 잘 돌봐 주시오.”

목사님의 강론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거저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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