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봄의 길목 - 여주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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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봄의 길목 - 여주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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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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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여주가 시로 승격이 되었지만 시장풍경은 예나 다름없고 인심도 변함이 없다. 여주장터는 시청 앞 광장 농협부터 시작되어 하리 중앙동 사무소까지 600여m거리, 길 양쪽 건물에는 기존 상점이 들어 있고, 여주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거리-중앙통 가운데 좌판을 놓고 세상없는 것 없이 모두 거래하는 곳. 10여개 아취로 멋을 내고 밤에는 아기자기한 전등불이 자태를 뽐내는 이곳이 여주장터다.

길옆 가게에서 경쾌한 젊은이들의 노래가 흐르고, 귀담아 들어도 못 알아듣게 지절대는 노랫말이 귀를 어지럽히면, 손님을 부르고 가격을 알리는 뚱보 아줌마들의 쉰 목소리가 대꾸하듯 목청을 돋운다.

싸구려 내복더미, 1000원 균일 잡화가 눈을 끌고, 메주, 무말랭이, 도라지, 냉이, 우엉, 생강, 도라지, 봄나물을 프라스틱 바가지에 담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촌로. 들기름, 참기름도 한 자리 차지하였다. 잡곡에는 한두 가지만 빼고는 모두 국산이라고 이름표를 달았지만 국산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발목을 뎅겅 잘라 양말을 씌우고 거꾸로 세운 꼴이 낯설지만 양말 선전 방법은 그게 제일 나은 것 같다. 봄이 오는 길목, 아직은 장에 나가 살 것도 준비할 것도 없으니 손님보다는 장사꾼의 숫자가 더 많다. 그러나 장에 나와 보면 봄이다. 갖가지 묘목, 화사한 꽃, 아담한 꽃, 멍울을 벗는 수줍은 꽃들도 봄을 배달할 채비를 한다.

각종 질병을 한 방에 날려 버릴 듯 선전 문구를 가득 매단 약초더미, 인절미, 송편, 술떡도 한 자리 차지하고 경산대추, 공주 밤도 크기를 자랑하며 좌판을 가득 채웠다. 장날 마다 듣는 목소리, 오늘도 점포정리, 원가이하 판매를 외치고 있으니 닷새마다 개업과 폐업을 하는 그는 엄청 난 재주꾼이다.

한 때는 여주에도 대형마트가 여러 곳 생겨 재래시장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용케도 버티고 있다. 끈질긴 여주장의 생명은 내 고장을 사랑하고 옛 추억을 간직하는 우리네 서민이 있는 날까지 영원 할 것이다. 이제는 구경하기도 힘든 내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 오신 검정운동화, 남색 스웨터, 도시락도 이곳 장에서다.

여주장의 물건이 달라지고 장사꾼만 바뀐 게 아니다. 장터 자체가 바뀌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구 장터는 시청 앞 광장에 있다가 오늘의 신 장터로 옮겼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중앙통 시장 뒤편 공터에 장날마다 포장을 치고 장이 서고, 서커스 공연, 백중씨름대회, 축구대회도 열렸었는데 그 곳에는 어느 틈에 2층짜리 상가가 들어서고 외지 상인들이 중앙통에 자리를 잡아 새로운 시장이 형성된 후, 상가의 위세가 중앙통으로 넘어와 버렸다.

정선장이나 화개 장터가 언론의 힘을 받아 유명해 졌지만 시장 크기나 물건의 종류, 사람들의 왕래 등 여주 장에 비교가 안 된다. 그만큼 여주 장은 크다.

봄이 오면 장터는 빽빽한 인파로 넘쳐난다. 농사를 준비하는 바쁜 농부도 포장마차에 자리를 틀고 너나들이 벗들을 불러 막걸리, 소주잔을 비운다. 안주로 녹두빈대떡 몇 장이면 너 댓 명이 거나하게 취할 수 있고 인심 좋은 안주인은 슬쩍 전 몇 조각을 덤으로 얹어 주니 막걸리 병이 또 비워진다. 주머니 푼돈을 털어 맛보는 시골 인심이며 즐거움이다. 아는 얼굴이 지나가면 억지로 불러 들여 함께 술잔을 기우린다. 집에 돌아 갈 때쯤이면 꽁치, 고등어, 동태를 몇 마리 골라 손질하여 비닐에 담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웅다웅 생존경쟁이 치열해도 오늘 만큼은 해방이요, 내 세상이니 농사일 걱정, 자식들 걱정, 시름을 잊어본다.

아끼던 쌀을 몇 말 등에 지고 미리 셈 해둔 농기구며 종자, 생활용품을 사면 왜 그리 마음이 허전한지. 쌀가마는 비고 앞으로 할 일은 태산인데, 야속한 싸전 주인은 자기가 쌀을 사 들일 때는 말을 쾅쾅 두드리며 내리쳐 쌀을 담고 자기가 팔 때는 조심조심 담으니 옛 노인들, 한 가마에 한 말은 축이 간다고 하였다. 이제는 무게로 달아 팔고 미리 포장을 하였으니 그런 속임수도 옛말이다.

시골 처녀들 시집 갈 때면 들르던 포목점, 그릇가게, 침구점이 대를 이어 아직도 성업 중이고, 시장 옆 은행에는 카드로 돈을 인출하는 젊은이들의 손길이 바쁘다. 벌써 봄채소 씨앗이 예쁜 포장에 담겨 장터를 덮었다. 장터 끄트머리엘 가면 고양이, 닭, 강아지, 토끼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 편하게 낮잠을 자는 놈, 짜증을 부리며 편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덤비는 놈, 정신없이 먹이를 먹는 놈 제각각인데, 좁은 장 안에서 대중이 보는데도 욕심을 채우려는 수탉이 슬그머니 얄밉다.

예전의 장터는 방송국이요 신문사였다. 각 동네의 갖가지 소식과 소문을 모았다가 또 다른 동네로 퍼 나른다. 다른 동네 소식을 아는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이 5일장 입담꾼의 열변을 엿듣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아는 이를 만나면 그 동네 친인척 안부도 묻고, 이쪽 소식도 전해주니 빠르고 정확한 소식통이다. 옛 장터는 늘 그랬다.
과일, 입을 거리, 먹을거리, 물건들이 바다 건너온 게 많듯이 장꾼 중에는 베트남댁, 필리핀 댁, 외국아낙네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남편 한사람 믿고 이국땅에서 새 삶을 펼치는 그들에게 무궁한 영광과 행복이 함께 할 것이다.

고향에 내려와 10여년 살다보니 내게도 이제 여주장터가 정겹고 아는 얼굴이 생겨 장날이 되면 가끔 구경을 나선다. 안면을 튼 주막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 여주중학시절 군침을 삼키며 배고픔을 참던 장터 풍경이 떠오른다.
물건이 바뀌고 사는 사람 파는 사람이 바뀌어 옛날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주장은 봄맞이가 끝났고 여름, 가을, 겨울, 철 따라 그렇게 바퀴를 돌며 발전한다. 깨가 쏟아지는 재미, 훈훈한 인심, 여주장터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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