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정리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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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정리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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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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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일찍 피는 꽃들이 거의 지고 있으니 정리채밀을 할 시기가 되었다.

겨울 동안 추위를 견디려고 똘똘 뭉쳐있던 벌들이 날씨가 풀리면서 슬슬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겨울에 혹시 꿀이 없어 굶을지 몰라 넣어준 설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깨끗이 벌통을 청소하려고 정리채밀을 한다.

순수한 아까시 꿀을 본격적으로 뜨기 위해 정리채밀을 하면서 벌통 안의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한다. 여왕의 유무와 건강상태, 알을 많이 잘 낳고 있는지 일벌들은 튼튼한지 수벌은 얼마나 있는지, 낡은 소비는 새것으로 갈아주고 벌통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을 살핀다.

채밀을 하려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벌에 쏘이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를 하고 양봉장으로 향한다. 우선 칼을 삶기 위해(꿀을 저장하느라 밀랍으로 덮은 것을 자르기 위한 것) 물부터 끓이고, 날아오르는 벌을 단속하기 위해 훈연기에 쑥을 넣고 불을 피운다.

꿀을 많이 뜰 때는 사람을 구해서 일을 하지만 정리채밀을 할 때는 꿀의 양이 적으니 남편과 둘이서 일을 한다.

우선 쑥 연기를 뿜어 벌들을 제압한 뒤 남편이 벌집을 들어 벌을 대충 벌집 안으로 털고 낸 다음 소비를 수레에 차곡차곡 싣는다. 연기를 쏘여 잠시 통 밑으로 내려갔던 벌들이 금방 정신을 차리고 날아오르기 때문에 소비의 벌을 터는 동안은 계속 연기를 뿜어 주면서 조수 노릇을 잘 해야지 벌일 하기가 수월하다. 벌을 돌보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꿀을 뜨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벌통의 수가 많지 않으니 서너 명이 할 수 있지만 2백통 이상의 대봉가들은 대여섯 명이 함께 일을 한다.

벌 일을 하는데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 지금은 외국인들을 많이 쓰고 있다. 외국인 중에도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없고 나이 든 사람만 일을 하러 온다. 구인광고를 내면 찾아오는 사람 열에 아홉은 시골인데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일요일도 쉬지 못하는 힘든 일이라고 그냥 가버린다. 벌은 일요일도 없이 쉬지 않으니 사람도 쉴 수가 없다. 일을 하러 온 외국인들이 일을 골라가면서 하는 것을 보면 일거리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이웃동네에서 벌을 기르는 사람과 품앗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양봉장에서 채밀장까지 소비를 옮겨 채밀기에 넣고 스위치를 넣으면 자동으로 기계가 돌아가 꿀이 잘 빠진다. 전에 탈봉기가 없을 때는 벌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해 채밀을 하면서 벌을 많이 죽였는데 요즘은 탈봉기 덕으로 죽는 벌이 없어 마음도 한결 가볍고, 채밀하기도 수월하다.

정리채밀을 하는 꿀은 1년 간 양념으로 쓰든지, 집에 있는 매화나무에서 딴 매실로 매실청을 담그기도 한다. 순수한 꿀은 아까워서 양념이나 효소를 만드는데 마음 놓고 쓰기가 쉽지 않다. 채밀이 끝나고 갈색을 띤 맑은 꿀을 보면 정말 신비하고 흐뭇하며,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있다. 나이가 드니 벌농사가 힘에 부쳐 그만 두고 싶어도 이 달콤한 맛에 쉽게 일을 놓을 수가 없다.

벌 일은 벌통 하나 들 수 있는 힘만 있다면 할 수 있다니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골에 살면서 일을 하니 이만큼의 건강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 감사하고 있다. 꿀은 신이 우리에게 준 완전식품이라고 한다. 더 좋은 꿀을 뜨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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