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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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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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2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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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내 도장은 상아 도장.

아이보리색, 굳이 사전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맑고 연한 노란색이다. 당초의 색은 지금보다 더 하얗고 맑은 색이었을 것이다. 그게 20여 년을 인주 밥에 묻혀 살다보니 붉은색이 서서히 스며든 모양이다. 그래도 노골적으로 붉은색이 아니고 노란색과 겹쳐 은은히 배어나 고급스럽다.

엊그제 도장방圖章房에서 도장을 보여주니 요즘은 상아 도장은 만들지 못하게 금지되었노라고 숫제 말도 못붙이게 한다. 야생동물 보호단체 앞이라면 당장 성토의 대상이 되었을 테고 그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주리를 틀리고 말았으리라.

나 같은 돈 없고 끗발 없는 놈이 무슨 재주로 상아 도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랴. 20년 전 경리팀장에 발령이 났다. 책상 위에 나무 도장과 상아 도장이 놓여 있어 웬 도장이 두 개씩이나 했더니 경리팀장은 하루에도 수천 번 넘게 도장을 찍어야 하니 웬만한 도장으로는 견뎌내지 못한다, 따라서 마모에 강한 상아 도장을 써야 한다, 위에 과장이 있고 실장이 있으니 그보다 커서도 안되고 너무 작아 천박해 보여도 안 된다, 그래서 중용을 택한 도장이란다. 과연 단아하고 겸양의 미덕이 보여 마음에 들었다.

직무 외에는 나무 도장을 썼다. 상아 도장을 아꼈다.

도장을 사용한 지 20여 년, 떨어뜨려 한 줄 금이 가고 귀퉁이 몇 군데 깨어진 것을 빼곤 깨끗하다. 휴지로 깨끗이 닦아내니 인주 밥을 배경으로 뽀얗게 살아나는 이름 석 자. 찬물에 막 세수하고 나온 누이의 얼굴처럼 산뜻하고 깨끗하다. 과연 탐심이 동할 만한 물건이다. 이러하니 상아 도장이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고 그 비싼것을 구하려고 많은 사냥꾼들이 사파리라는 이름으로아프리카 밀림에서 코끼리를 살해했을 것이다. 해마다 대량학살로 사라져 가는 코끼리들. 멸종 위기에 이르자 참다 못한 야생동물 보호단체가 나서서 상아 제품 매매를 금지하고 코끼리 사냥을 가로막고 나선 모양이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도장으로 낭패를 보지 않았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도장으로 수없이 곤욕을 치른 억세게 재수 없는 사나이-나 같은 공무원도 없을 것이다. 민원서류 처리 기준도 제대로 모르는 놈이 겁도 없이 찍어 버린 도장 하나로 남의 재산을 거덜낸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검찰에 고발되었고 수없이 끌려 다니며 수모를 당했으며 급기야 중징계를 받았다. 나의 형벌이야 당연한 처사라 하지만 나로 인하여 재산을 잃어버린 그는 어찌해야 할지 하염없이 울었다.

징병검사에서 3대 독자(獨子) 6개월 군복무(軍服務) 특례를 잘못 적용해 병무청으로부터 무지무지한 질타를 받았으며 건축물 철거 보상금을 당사자가 아닌 엉뚱한 질녀姪女에게 지급해 그 돈 회수하는데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은 일이며 도장을 찍는 건건마다 사건에 휩싸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울었다. 그때마다 공직을 때려치우려했다. 나의 우유부단함,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고, 빈둥빈둥 놀고 먹는 양반집 자제처럼 무위도식하는 가장으로서의 내가 겁나 그도 못할 짓이었다. 그럭저럭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죽자고 따라다니던 악몽도 잊혔고 직업갈아 탈 나이도 지났다. 남들 다 진급한 뒤 막차지만 그래도 승진은 했다.

그렇게 못살게 구는 도장 사건도 다른 사람에게는 어쩜 그리 쉽게 지나는지. 흔한 게 인감 사건이고 인감 잘못 발행으로 공무원 옷 벗고 나간 사람들도 부지기수.

나의 팀 여직원이 인감 사건에 말려들었다. 그 사건을해결해주려 무진 애를 썼다. 애쓰는 내 모습을 보다 못한 그녀가 말렸다. “그만 두세요. 잘 되겠지요.”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무사히 해결이 된 걸 보면 사람따라 팔자소관은 가지각색인 모양이다.

이젠 민원공무원의 피해가 줄었다. 인감도 전산처리 되었고 사사건건 말썽을 피우던 크고 작은 공개경쟁 입찰도 전산화 되었으며 공무에 관한 대부분이 컴퓨터로 수행하기 때문에 작위적 조작이 아닌 한 공무원들의 피해 사건도 사라졌다.

퇴직을 했다. 도장 인생도 끝났다. 도장 찍을 일도 없어졌고 찍어야 할 날인捺印도 사인sign으로 대신 해 도장 찾을 일이 없어졌다. 우연히 책상 청소를 하다가 서랍뒤에 달가닥거리는 도장을 찾았다.

도장을 들여다본다. 아이보리, 상아의 어금니, 아프리카 밀림이 보이고, 사막이, 오아시스, 킬리만자로, 그리고 코끼리 떼, 총성과 살육, 도장으로서의 피 묻은 상아 한 조각….그 밑에 어른거리는 또 다른 그림자. 강보에 싸인 나의 이름 석 자를 얻으려 유명 작명가를 찾으시는 아버님. 도장으로 인한 질곡의 길을 걷던 아내. 징계성 전출로 쫓겨 가던 날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던 어린 아들….

인터넷에 손자 이름 새겨 준다고 평생 쓰던 도장을 가져온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그렇다. 이제 나이 칠십이 넘었다. 도장 쓸 일이 없어졌다. 내겐 손자가 없으니 이 도장 아들의 이름 새겨 주고 싶다. 그러나 상아 도장으로 인해 죽어간 코끼리가 생각나 얼른 접었다.

더구나 도장에 얽힌 나의 악연까지 아들에게 대물림될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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