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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만년필

기사승인 2019.06.27  13: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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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드디어 만년필이 왔다. 독일제 라미. 며칠 전 목사님이 심방尋訪을 오셔서 만년필을 준다는 걸 싫다고 했다.

“요즘 컴퓨터로 글을 쓰지 누가 만년필을 씁니까.” 목사님 일행이 떠난 뒤 아내가 다짜고짜 나를 혼냈다. “목사님이 만년필을 준다면 다소곳이 받을 것이지.

건방지게, 글은 컴퓨터로 쓴다고? 당장 다시 달라고 해요.” 이야, 이거 큰일이다.

“나는 만년필 쓸 일이 없어. 컴퓨터로 쓴다니까.” “나는 만년필 쓰고 싶어요. 당장 달라고 해요. 내가 쓸 거니까.” 난감한 일이다. 싫다고 한 걸 어찌 다시 달라고 할 수 있는가. 애들도 아니고.

매일 시달렸다.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다. 도리 없이, 목소리 가다듬고 목사님에게 전화를 건다.

“목사님,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일전에 주신다던 만년필 다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내가 목사님이 주신다면 냉큼 받을 것이지, 뭔 배짱으로 싫다고 하느냐, 매일 밤마다 구박을 하는 통에 못 살겠습니다.”

“아, 그래요. 당장 드리지요. 주일 날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단 불은 껐다. 아내의 등쌀은 모면했다. 그리고 주일 전, 금요일 구역예배가 있어 아내가 목사님을 만났을 텐데, 아무 말이 없었다. 틀림없이 아내에게 만년필을 보냈을 텐데.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물었다.

“목사님이 만년필 안 주셔?” 그제야 내놓는다. 아니나 다르랴. 전화가 왔다. 만년필 받았냐고.

“아아, 받았습니다. 이거 쓰시던 걸 보내셨네. 하나 밖에 없는 만년필을, 목사님은 무엇으로 쓰시려고?”

만년필에 잉크가 쓰던 대로 남아 있고 잉크병까지. 좋았다. 옛날,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만난 것이 펜과 잉크다.

펜으로 처음 글을 쓰자니 잘 써질 리가 없었다. 잉크가 굵게 나오는 것 같아 오므려서 쓰니 안 써져 그걸 강제로 다시 넓혔더니 잉크가 너무 나와 공책이 말씀이 아니다. 좁혔다 넓혔다 시련의 펜촉이 제대로 써질 리 만무.

펜촉은 날을 세워 노트를 찢기까지 한다. 그걸로 글을 쓰다가 잉크병을 쏟아 책상, 걸상, 가방, 책, 노트, 교실 바닥까지 잉크, 잉크, 잉크….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늘어 나는 잉크자국에 잉크 범벅이 되어 옆 짝의 핀잔을 들어야 했고, 앞뒤 친구들의 지청구도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구세주 만년필을 만났다.

중학생 땐 감히 꿈도 못 꾸다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쓰기 시작했던가. 값이 제법 떨어지고 대중화 된 한참 뒤의 일이다. 신기하고 편리하고 마법과도 같았던 만년필을 그냥 놔둘 리 없다.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글자 몇 개 썼다고 청소 한답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펜촉에서 몸통, 튜브까지 뽑아놓고 세척했다. 손은 물론, 대야까지 퍼렇게 물들여 놓고. 그리고 그 비싼 걸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잃어버리고, 사고, 사고 나면, 또 잃어버리고…. 볼펜이 나와 다행이지 볼펜이 안 나왔다면 아직도 잃고 사기를 계속했을 것이다.

만년필로 글을 쓴다. 사각사각 유려하면서도 은밀한 밀어. 종이와 만년필이 닿는 마찰음은 내 첫사랑의 언어. 만년필이 종이의 결을 타고 나가는 감촉이 좋다.

연인의 손길로 와서 거역할 수 없는 지조를 심고 가는 무게.

아내의 이름을 쓰고, 아들과 며느리들의 이름을 쓰고, 고등학교 내 마지막 선생님, 그리고 나이 어린 친구들. 내가 죽어 떠날 열차 위에, 그리고 그 열차에 타야하는 모든 사람들, 신세진 형제자매, 잊을 수 없는 친구, 선행을 베푼 여인,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이웃, 다툼의 결말을 못 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 내가 때린 사람, 나를 때려야 할 사람. 내가 욕을 해야 할 사람, 내게 욕을 해야 할 사람, 그들의 이름을 쓴다. 밤을 새워 이름을 쓴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떠나버린 눈동자 위에, 빛나는 구두 위에, 아름다운 손등 위에, 당당하게 걸어가던 바지 위에, 스커트 위에, 단정하고 지혜로운 단발머리 위에,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쓰던 만년필을 선뜻 보내준 목사님의 사랑으로 글을 쓴다.

요한계시록, 유다서, 요한 3, 2, 1서… 밤을 새워 써도 이 연애편지는 끝날 것 같지 않다.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나의 잃어버린 언어, 동력, 여인, 바람, 실망, 희망, 청춘, 격렬, 동맥, 바다, 휴게실, 여명과 황혼 …요한, 누가, 마가, 마태.

중앙신문 webmaster@joongang.tv

<저작권자 © 중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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