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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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0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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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아들이 근무처에서 돌아와 이틀 묵고 다시 떠난다.

그때마다 배웅을 나간다. 그러면 아들이 쓸데없이 서성이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고 성화다. 그래도 아내와 나는 아들의 자동차 주변을 뱅뱅 돌며 떠날 줄 모른다. 급기야 성질난 아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들어들 가세요. 괜찮아요!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몇십 년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아들은 장거리 운전을 하려면 자동차 예열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점검할 것도 있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니 괘념치 말고 들어가란 말인데 부모된 도리가 어디 그런가.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 서성이는 것이다.

요즘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배웅의식도 간편해졌다. 문 열고 서너 발자국 승강기 앞에서 배웅한다.

“잘 가.” “잘 있어.”

그게 인사다. 어떤 땐 그 서너 발자국도 생략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려서 친구 집에 놀러갔다 돌아오는데 친구란 놈이 발라당 드러누워 잘 가라는 인사를 했고 나는 받았다.

그거 편해 좋겠다 생각했고 금방 전염돼 나도 그렇게 몇번 인사를 해 봤다. 번번이 떨떠름한 게 석연치 않았다.

갑자기 서울에서 문방구를 하는 사촌이 몇 년 만에 들렀다. 만년필과 볼펜 한 자루씩 들고.

사연은 오늘 아침, 갑자기 만년필 생각이 나, 값이 얼마나 되나 전화로 물었던 건데, 이렇게 득달같이 가지고 오다니. 그런 사촌을 문 빠끔히 열고 잘 가라고 보내고 말았다. 보내고 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괘씸하고 무례했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전화를 걸어 잘 들어갔는지. 쓸데없이 만년필은 왜 가져 왔는지. 더구나 비싼 볼펜까지, 하며 공손히 묻고 때늦은 안부를 전했다. 그게 괘씸함을 상쇄시켰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면 안 되는데.

사십 년 전의 일이다. 막 제대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친구가 공무원 시험응시 원서를 가지고 왔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지 무지무지 고단해 사랑방에서 곤하게 잠에 떨어졌는데 응시원서를 들이대고 공무

원 시험을 보라는 것이다. 얼마나 잠에 취했는지 잠결에 듣고 웅얼웅얼 대답은 한 모양인데 잘 가란 인사도 못 한 채 보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지원서로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했으며 언제나 홀대했던 그날이 밟혀 만나면 밥을 사고 술을 샀다. 그리고 엊그제 만나 내가 밥값을 내려고 하니 극구 자기가 낸다고 우겨 그가 냈다.

“열 번 얻어먹었으면 한 번은 내가 내야지.”

“열 번 사준 적 없는데.”

“있어.”

그는 내 죄를 모른다. 왜 내가 만날 때마다 밥 사고 술사야 마땅한지.

언젠가 병원에서 내원 환자를 쉽게 분별하기 위해 손등에 바코드를 붙여 주는 게 볼썽사나워 간호사에게 따졌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왜요.”

“우리가 물건이냐. 인간들 하나하나 바코드 붙여 시장바닥에 내다 파는 물건 취급을 하다니.”

아무 소리 못하던 간호사 내가 막 병원을 떠나려는데 말했다.

“선생님 말씀 듣고 게오르규의 ‘25시’가 생각나 한참 생각했어요.”

“그래.”

집에 돌아와 당장 ‘25시’를 구해 읽었다.

번역본이라도 미문이고 잘 읽히는 글이다. 그 책 도입부에 나온 대목.…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애인을 안고 방으로 들어오는 청년의 주위를 따라다니며 할 일 없이 청년과 똑같이 비를 흠뻑 뒤집어쓰고 주위를 맴돌고 서성이던 젊은 목사.

‘하나님도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은 헛수고를 하셨으리라. 하나님은 실제로 유용하지 않은 많은 사물들을 창조하셨어. 하지만 그것들은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야. 인간도 하나님의 무용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나의 행동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성의는 훌륭하다. 그건 헛수고이긴 해도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해.’

그 대목을 읽은 후, 아들 배웅을 할 때면 무조건 거실 문을 열고 나가 대문을 열고 나가 안마당을 거쳐 바깥 마당에 서서 예열 중인 자동차 옆에 서서, 이것저것 점검하는 아들의 주위를 맴돌면서 어리석고 헛된 수고를서슴지 않는다. 그게 어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훌륭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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