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 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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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07.2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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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버렸다. ○○○조정위원직을.

당초, 공무원을 퇴직하고 얼마 안 돼, 공직에 있을 때모시던 상사로부터 권유를 받았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신망 있는 인사로 조직된 조정위원으로 들어와 일해 보자고. 그걸 반색한 게 아내였다. 남편이 퇴직 후 허송세월 보내는 꼴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이웃에 자랑했고 대단한 명예로 알았다.

○○○이 어디냐? 그 대단한 곳을 드나드는 남편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조정위원이라니. 그리고 뿌듯해했다. 아내뿐이 아니었다. 퇴직공무원 중 선택된 위원의 부인들이 모두 그렇게 좋아했으며 그만두면 못내 서운해할 거라고 했다. 남들의 시기와 선망의 대상인 고위 공무원에서 밀려나 별 볼일 없는 필부필부가 되었으니 사회와 연결된 마지막 끗발이라도 잡고 싶었던 심정인 모양이었다.

조정위원 배정을 받았다. 해야 할 일은 일상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다툼들을 해결하고 푸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배상의 조정, 토지분쟁의 조정, 쌍방과실의 조정, 사이버 폭력의 조정, 시설물 소유권 분쟁의 조정….

내가 해야 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행정공무원이 해당법을 제대로 읽어본 일도 없고 연구한 적도 없으며 할필요도 없었다. 가끔 ○○간부에게 조정 일주 전에 해당 조정 문건을 미리 읽게 해, 해당 법을 읽고 연구할 틈을 달라고 했지만 번번이 그러자고 하면서도 유야무야. 언제나 생소한 사건에 부딪혀 당혹스러웠다. 따라서 안건은 당연히 ○○공무원 퇴직자들의 몫이었다. 나는 다만 공무원 인사라는 얼굴 마담. 우두커니 앉아 남들 조정하는 것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나오는 것이 전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내 옷이 아니야. 커도 너무 크던가, 작아도 아주 작았다. 화려한 모직毛織이던가, 찬란한 견직絹織이던가 직종이 완전 다른 피복이다. 얼른 벗어 던져야 할 옷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사회통념에 의한 보편적 제안을 내놓고 싶어도 쉬운 게 아니었다. 내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게 하던가, 재산상의 불이익을 준다면 그걸 어떻게 치유하고 감당할 것인가. 무엇으로보상해 줄 것인가. 물론 ○○이라는 보호막이 있다손치 더라도 그렇다.

아무래도 나는 안 되겠어. 나는 못 해. 어느 것 하나 손댈 수 없었다. 어딘가 삐그덕 하는 날이면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라도 나는 못 해. 절대 못 해.

조정실 앞에 걸린 다산의 흠흠신서欽欽新書 서문을 읽는다.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 삼가고 두려워할 줄 몰라 털끝만한 일도 세밀히 분석 처리하지 않고 소홀히 흐릿하게 하여, 살려야 할 사람을 죽게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을살린다. 그러면서 오히려 태연하고 편안하게 여긴다.

그렇게 맞지도 않는 옷을 무슨 미련으로 오래 입었는지. 물론 그런 일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같은 조정위원들이 서서히 깔보는 눈치였다. 그렇게 느꼈다. 미련 없이 버렸다.

그런 자리가 하나 둘이 아니다. 수필가로 문인협회 지부장이 되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지회장이 되고 보니 크고 작은 협회, 위원회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모두 해당 부서 법령이나 회칙, 약관에 의한 제 규정에 의한 수순에 불과한 것일 뿐 위원회에 들어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일도 아니다.

자, 모두 벗어버리자. 어른인 체 높으신 분인 체 궁상떨지 말고 발가벗은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들이 말하는 감투란 것들 모두 벗어 던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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