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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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한다는 것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08.2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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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도움을 받았다. 사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평생 음료수 한 상자 들고 다녀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사례를 한단 말인가. 힘이 든다. 더구나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선물 상자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도저히 못할 노릇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공무원했던 사람들은 누구나다 그런 모양이다. 언젠가 사무실 직원이 “공무원 출신은 한 번도 선물 들고 들어온 것을 못 봤어요”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공무원생활하면서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는 게 생활모토였다. 예부터 공무원들이 얼마나 받아먹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자기 돈 주는 것도 아니고 국가 돈을 집행하면서 자기 돈으로 생색내는 양 업자, 국민 위에 군림했으니 세인들이 아니꼽게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게 하면 나라를 좀먹는 꼴이라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라는 주문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한 내가 공직에서 퇴직하고 나와 처음부터 사회생활을 다시 하는 기분으로 하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무조건 들고 가서 줘. 김영란 법에 걸리지는 않을까? 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 10만 원. 선물이니 5만 원만 하면 되겠네. 그런데 이거 낯 간지러워서, 그래도 10만 원은 해야지. 그러다 걸리면 상대방은 무슨 낭패며 나는 무슨 망신이냐. 그래도위험을 무릅쓰고 10만 원을 하기로 하고 용기를 내서 떠났다. 그런데 왜 그리 석연치 않은지. 받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상대방이 거절하는 것도 그렇다. 그걸 어떻게 무마할 건가. 혹시 신고를 하는 날이면 개망신이다.

아침부터 아내와 의논을 해 봤지만 썩 좋은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선물도 그렇다. 과일을 하자니 보는 눈이 많아 쉽게 받을지. 한우를 하자니 값이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상품권으로 하자. 아들이 주고 간 상품권 10만 원으로 하자.

상품권이 꽤 오래된 것이라 구겨지고 봉투도 해어져 선물 같지가 않았다. 다리미로 다리고 문방구에서 봉투를 사 갈아 넣었다. 산뜻하고 보기에 좋았다. 그걸 책갈피에 끼워 넣고 덜렁덜렁 찾아갔다. 아, 왜 이리 떨려.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건만.

문을 열었다. 대범했는가. 대범했을 것이다. 들어갈 때마다 급히 쫓아 나오는 직원이 나왔다. ○○○선생 있어요. 연차 중이다. 다음 날 나온다고 한다. 그래 다음 날다시 오리라. 나왔다.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법에 어긋나는 짓은 안 하는 게좋다. 걸리는 날엔 서로 귀찮아진다. 신세 망치는 수가 생길 수도 있다. 법대로 선물은 5만 원이니 상품권 5만원을 하자. 어느 놈이 따져 묻는다 해도 5만 원이니 뭐라 할 것인가.

그렇게 낯 간지러운 5만 원 봉투를 들고 찾아갔다. 그래도 안 해본 짓이라 덜덜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

마지막 서류를 내놓고 검토를 기다리며 요즘 감사기관에서 찾아오지 않는가, 여기도 김영란 법이 적용되는가,

몇 마디 하다가 드디어 봉투를 내놓았다. 김영란 법에 저촉이 되지 않을 정도만 넣었다. 내 작은 성의다. 아~아니다. 아니 된다는 말씀이다. 자기가 해준 것도 없는데 왜 받느냐. 그것을 주고 가면 집으로 쫓아가 되돌려주고 온다고 우겨댔다. 한사코 말려 놓고 나오는데 아니나 다르랴. 밖에까지 쫓아 나와 내놓는다. 가까스로 나왔다.

아~ 진땀나.

지난날들이 생각난다. ○○면사무소에서 사업 관계로 많은 민원서류를 떼어가는 통에 여직원에게 항상 미안해하던 민원인이 인지대 이삼백 원 하는 걸 만 원짜리 한 장 내놓고 점심이나 하시라 나왔더니 마당까지 쫓아 나와 돌려주는데 어찌나 …부끄럽고…, …미안하고…,

…송구하고…, …하지 말아야 할 짓 한 것만 같고…, 한마디로 착잡하더라며 며칠 지나 내게 털어놓았다.

“그 여직원 너무하는 거 아냐.”

오늘 내가 그 짝이 났다. 주고 안 받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예측은 했지만 나 또한.

옛날 이런 일이 있었다. 이른 봄 화창한 날, 병역관계로 도움을 받았던 민원인이 생선 한 손, 싱싱한 상추 몇 포기, 술 한 병, 그리고 하얀 봉투가 든 상자를 나 없는 사이에 집에 찾아와 두고 갔다. 음식은 도로 보낼 수 없으니 우선 먹고 돈으로 계산해 돈 봉투와 함께 우편으로 보냈다. 며칠 후 들리는 소문에 ‘너무했다’가 정평으로 났다. 남의 성의를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 그 후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마 평생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산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사례할 게 있어서 고맙다는 표시를 하면 거절하는 수도 있고, 거절하다 너무 냉정하다 해서 먹다 보면 습관이 되어 한계를 넘어서고,그래서 영어의 몸이 되는 수도 있으며…. 김영란 법이생겼다. 그것은 말단 공무원의 법이다.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 장·차관, 정치인, 돈에 걸려든 인종의 한계가 끝이 없다. 그들의 뇌물 액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이는 받아먹은 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내 공무원 초창기의 구호 ‘주지도 받지도 말자’가 백번 옳다. 그런데 내가 왜 최근 들어 크고 작은일에 사례하고 싶은 생각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제 인간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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