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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09.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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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30여 년 전에 구해 놓고 읽지 못한 오 헨리의 단편집을 읽는다.

제분업계의 대부가 이층에서 뚫어진 쥐구멍으로 쏟아지는 밀가루를 흠뻑 뒤집어 쓴 방앗간 주인이 되어 노래 부르자, 젊은 여자의 “아빠 덤즈를 집에 데려다 줘.” 생각조차 나지 않던 어린 소녀의 오래된 감각 속에서 자아올린 기억으로 그들은 잃어버린 부녀로 만난다. ‘물레방아가 있는 교회’의 끝 장면이다.

 ‘돌아온 양심’은 금고털이 도둑이 과거를 청산하고 백만장자의 딸과 결혼하기로 한다. 장인이 신형 금고를 자랑하는데, 금고 안에 들어가 장난을 치던 장인의 외손녀가 금고에 갇히는 사고가 나자 황금빛 인생을 포기하고 금고털이 연장으로 금고를 열고 탐정에게 빨리 잡아 가시오, 두 손을 내민다. 하나 탐정은 “나는 당신을 몰라. 내일 당신의 화려한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잖아” 하며 사라지는 반전.

그 외에 경찰에 잡혀가 교도소에서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고 싶은 범법자, 잡혀갈 빌미를 주고 또 주어도 잡아가지 않는 경찰들, 울려 퍼지는 찬송가를 들으며 제대로 된 인간 되자고 개심한 순간 범법자라는 것을 감지하고 수갑을 채우는 ‘경찰과 찬송가’. 주기적으로 아내를 폭행하고 옷 한 벌, 극장표를 선물하는 친구의 남편을 부러워하는 어떤 여자, 남편을 구타하면서까지 남편의 폭행을 유도하지만 굴하지 않고 끝까지 아내를 위하여 봉사하는 남편에 절망하는 여인 이야기

‘할렘의 비극’

그리고 비극으로 치닫는 와중에 환희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 내 젊은 날에 열광하던 아름답고 기막힌 반전들이다.

생각난다. 30여 년 전의 흥분. 30여 년 전 심장의 박동소리. 그리고 50년 전 친구 I의 이야기. 목사가 밤새워 노름판에서 막대한 돈을 따고, 다음 날 아침 교회에서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기막힌 설교를 해 수많은 목회자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고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소설. 부도덕한 목사라도 20대인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것들을 쓰고 싶었다. 언젠가 기막힌 소설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말리라. 그 열망熱望으로 소설을 지망한 건데 어찌 수필에 발목이 잡혀 20여 년째 수필만 쓰고 있다.

그때의 열광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폭포처럼 쏟아지던 순수와 숨찬 심장의 박동과 빛나던 눈동자와 끝간 데없는 눈길을 달리던 나의 건각들. 그것들을 소설이 아니라도 수필에 왜 쓰지 못했을까.

우물쭈물 젊은 날 다 허비하고 나이 50에 쉽게 배우고 안일하게 쓰는 수필의 길로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스며든 것은 아닐까. 소설-사실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신비주의, 초현실주의, 미니멀리즘, 숱한 문예사조를 알아야 하고 소설의 이론을 배워야 하며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일망타진하고 한국 소설 전반을 각개 약진으로 격파해야 하며 현대소설의 흐름을 꿰뚫어야 하고 철학을 천착해야 비로소 소설에 입문할 수 있을진대 어느 세월에 그걸 다 섭렵해 소설을 쓸까.

수필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쓰는 글이야. 젊은 애들은 못 써. 늙으면서 보고 배운 것들 느낀 것들이 모여 도가니에서 부글부글 끓고 오래 묵히고 익혀 잘 빚은 한 잔 술인 듯 스며 나오는 것이 수필이야. 그럴듯하게 토를 달고 운을 붙여 애써 늙은이 글이라는 당위성을 붙여 편함과 게으름을 찍어 바르며 잘 썼네, 못 썼네, 찧고 까불다 벌써 60을 넘어 70에 들어섰다.

그리하여 좋든 싫든 쓸 수 있는 건 수필 뿐. 그 잘난 수필이나 열심히 쓰자. 뉘 알랴. 내 수필에 미쳐 내게 상을 준다거나 내가 무슨 수필의 대부. ○○계열의 개척자라 우러러볼 미친놈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는 법.

늦지 않았다. 젊은 날의 혈기를 차용하여 기막힌 반전을 인용하여 세상 한 번 놀라게 하자. 아직 죽을 시간은 아니다. 누구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쓰면서 펜을 쥐고 죽었다고 하지 않던가. 죽는 날까지 혈기와 반전을 자아올려 쓰고 또 쓰자. 쓰다가 죽는 날까지 쓰자.

“내가 쓰는 이 글이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소녀에게 빵 한 조각을 구해주는 데 쓰일 수 있을까?”

사르트르의 말이다. 그는 그의 글이 아프리카 소녀의빵 한 덩이를 구하는 데 아무 짝에도 쓰여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토마스 부르시히의 소설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에서 호텔 엘리베이터 벨 보이가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분투노력해 소설을 써서 출판사에서 채택되어 발간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 원고를 애인에게 보여주고 애인의 소감을 듣고자 한다.

“너의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

그녀의 말에 고무되어 시가지를 달린다. 계단을 세 개네 개씩 건너뛰며 달린다.

과연 나의 수필은 아프리카 소녀가 아니라 국내 청소년 누구에게 라면 한 개라도 사 줄 수 있는가? 나의 수필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기쁨이나 슬픔 한 줌이라도 안겨 줄 수있다면 다행이다.

나는 왜 쓰는가. 이 막막한 의문 앞에 좌절한다. 이질문 앞에 나는 과연 답할 수 있을까.

젊어 소월의 초혼을 미친놈처럼 외웠으며 미당의 시를 읽었고 목월의 시를 암송했고 조지훈의 시를 읽었으며 만해의 시에 심취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반복해 읽었으며 유주현의 탄탄하고 당당한 문체에 홀린 바 있고 김승옥의 감성의 글 앞에 어쩔 줄 몰랐고 윤동주의 십자가 앞에 기도했으며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거푸 읽고 보르헤스를 탐독했다.

그들의 글들이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친구였으며 그들을 닮으려 노력한 날들이 무릇 기하이며 아, 이런 것들이 나를 글 쓰게 했고 나의 글은 그들의 글들이 모여 좌충우돌 축조하고 연쇄되어 내 글을 구성한다. 따라서 나는 그들 앞에 감사하며 그들의 의지가 모여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쓴다. 연쇄에 감사하며 보답하기 위하여 나의 수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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