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심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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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심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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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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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재(수필가, 본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지난가을에 그동안 정성을 들여 개수를 불린 알뿌리들을 마당에 심었다. 여기저기 흩어 키우던 것들인데 텃밭 좋은 자리에 이랑을 만들어 종류별로 나누어 빛깔이며 키, 피는 시기 등, 내가 쌓아온 얄팍한 지식을 모두 보태어 알뿌리 꽃밭을 만들었다. 강렬한 원색이 어우러지는 유럽식 꽃밭을 꿈꾸며 수선화, 튤립, 히아신스, 알리움, 스노우 플레이크 등을 모아 심었다. 뿌리 크기에 맞춤하게 구멍을 파고 묵혀두었던 퇴비 한 줌씩을 넣어주고는 혹 겨울 추위와 가뭄에 상할까 봐 볏짚으로 덮어 마무리한 후 꼬박 다섯 달을 들락거리며 봄을 기다린 것이다.

눈 속에서 새싹을 밀어 올리는가 싶더니 히아신스가 먼저 꽃을 피우고 경쟁하듯 튤립도 꽃을 품었다. 향내가 마당에서 춤을 춘다. 바싹 마른 흙이 폴폴 먼지를 일으키고 영동 할미의 심술궂은 바람까지 불어 까칠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어김없이 봄은 내 뜰을 찾아온 것이다. 봄기운이 나를 들썩거려 아침이면 거의 마당에서 떠오르는 해와 만나곤 했다.

손바닥 살피듯 꽃밭을 꿰고 있는데 가운데 몇 자리가 휑하다. 고라니 발자국에, 쥐구멍까지 숭숭 뚫린 꽃밭을 보며 저네들이 겨울 양식으로 먹었나 싶어 다른 꽃들로 채우려 꽃삽을 넣었는데 무언가 부드럽게 닿는 느낌이다. 남편에게서 늘 빈자리 없이 꽃을 채운다는 핀잔을 듣는 터라 또 포개어 심었나 싶어 살그머니 흙을 뒤집었더니 묘하게 생긴 것이 달려 올라온다. 아직은 볕을 못 본 잎은 흰빛에 가깝고 돌돌 말려있다. 몇 년 전엔가 가을배추 뿌리에 혹이 달렸던 기억이 떠올라 병든 것이 있었나 보다 하고 옆으로 밀쳐놓고 다시 호미로 흙을 어루만지니 이번에는 옅은 보라색 꽃잎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채 얼굴을 내밀었다. ‘별일이네’ 혼자 중얼거리며 파내는데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그 속에서 나와 기지개를 켠다. 그 틈새에도 생명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몇 개가 계속 나오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이를 어쩌나 거꾸로 심어진 히아신스다. 하얀 잔뿌리는 아래로 내려가려 하고 싹은 땅 위로 올라가려 해서 이리되었나 보다. 돌이켜보니 가을 그 무렵에 심하게 무릎이 아파 병원 출입을 했었는데 아마도 대충 심다 보니 거꾸로 심은 모양이다. 

거꾸로 심어진 꽃들이라니. 하늘을 이고 피울 꽃들이 혼돈 속에서 잎을 내밀다가 길을 잃었나 보다. 잘 못 들어선 길을 벗어나느라 지친 모습이 안쓰럽다. 뿌리 반대쪽으로 벋어 가다가  하늘이 멀어짐을 알아 방향을 바꾸었지만, 흙의 무게를 감당치 못해 제자리에 맴을 돌고 있었나 보다.

땅에 저절로 떨어진 작은 씨앗들은 거꾸로 곤두박질을 하든지 모로 눕든지 싹이 트면서 땅 위로 살길을 찾아 나오고, 땅속에서 씨앗으로 발아한 작은 알뿌리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솟아 나와 우리와 마주치는데  다 자란 알뿌리를 내 손으로 거꾸로 심은 까닭에 이 봄에 아릿한 통증이 가슴에 담긴다. 하기야 산길에 잘 자라던 꽃들도 어느 해에는 흔적만 남기기도 하고 더러는 아예 사라지기도 하며 어떤 해는 전혀 엉뚱한 것들이 와서 자라기도 한다. 내 집 마당 안에서도 이 일은 수시로 일어난다. 지난해 피었던 자리에 없어진 꽃을 엉뚱한 곳에서 찾아내기도 했고 몇 년 동안 사라졌던 꽃이 슬그머니 제자리에 돌아와 그 수를 늘려놓은 적도 여러 번이다.

생명은 기다림이다. 살아있기에 버리지 못해 동그랗게 말렸던 것들을 심었더니 때늦게 보라색 꽃방망이가 올라와 향내를 폴폴 풍겼다. 몰골이야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거꾸로 심은 내 탓은 등 뒤로 넘기고 헤픈 웃음으로 나를 위로하려 한다.

이제는 풀이며 꽃이며 함께 어울려 있는 그대로 살게 두어야 할까 보다. 알뿌리들을 해마다 장마 전에 캐서 말리고 가을이면 다시 심던 이 일들도 이젠 그만하고 싶다. 풀에 치여 꽃이 한두 개만 핀들 어쩌랴. 생명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순환되고 있다. 저들 가운데서 사라지는 것 또한 저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간밤에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봄비로 촉촉해진 흙은 엄마 젖을 충분히 먹은, 방글거리는 아가의 얼굴처럼 윤이 난다. 행복하고야. 발아래 땅을 밟는 것이 황송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아까운 봄날을 누리며 이리 저리로 숨은 꽃을 찾아 마당을 밟는다. 거꾸로 심은 잘못으로 가슴이 아릿한 봄이건만 살아있음으로 여전히 나를 황홀하게 한다. 40여 년 전에 거꾸로 태어났던 내 딸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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