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㊿ 청학동 청담·청학풀장으로 유명세 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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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㊿ 청학동 청담·청학풀장으로 유명세 떨쳐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4.04.1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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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청학동(靑鶴洞)은 구한말 인천부의 먼우금면에 속해 있던 곳이다. 옛날에는 대부분이 바다에 맞닿아 있는 해안지대였고 아주 오래전부터 바다에 의지해 사람들이 살아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청학동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 이곳에는 청릉마을, 본말, 뒷골, 물푸레골, 안골 등의 여러 마을이 있었다. 그 뒤 1914년 일제가 이들 마을 모두 합해 청학리를 만들었는데, 이 이름이 광복 뒤에 그대로 청학동이 됐다.

운전면허시험장이 지금의 남동공단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청학동(현 영남아파트자리)에 있었으며 필자도 1979년 이곳에서 운전면허(경기도면허)를 취득했다.

이와 함께, 청담풀장과 청학풀장이 문학산 기슭에 위치, 여름 철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았다. 청학동에 풀장이 많았던 것은 지하수의 양이 많은 데다 맑고 차가웠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청담풀장의 경우 피서철에 워낙 많은 피서객이 몰려 방가로를 빌리기 위해서는 사전에 예약을 해야만 되는데 그나마도 줄(빽)이 없으면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필자도 여름 피서철에는 의례 청담풀장과 송도유원지의 방가로를 자주 이용해 친구들이 필자를 만나려면 두 곳을 방문해 그중 한 곳에서 만날 정도였다. 당시 인천일보에 근무하면서 출근과 퇴근을 여기서 할 정도였으니 여름 한 철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학은 일본인들이 청릉마을의 ‘청’자와 문학산의 ‘학’자를 따서 새로 만든 이름이다. 일설에는‘문학산 남쪽에 위치한 푸른 숲속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청학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보다는 일제가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연수구 청학동53번지에 있던 외국인 묘지. (사진제공=연수구청)
연수구 청학동53번지에 있던 외국인 묘지. (사진제공=연수구청)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600년대 초반에 경주 최씨를 비롯해 반남 박씨, 진주 김씨 일족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이중 경주 최씨가 주로 살던 곳이 본말, 반남 박씨가 모여 살던 곳이 청릉마을, 진주 김씨가 모여 살던 곳이 물푸레골이었다고 전한다.

경주 최씨의 집성촌에는 그 집안의 사당인 ‘청학사’가 지금도 있어 후손들이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이 동네에는 나이가 500여 살 정도로 추정되는 시 지정 보호수 느티나무도 남아있다.

한편 청학동에는 인천항의 개항 이후 인천에서 활동했던 외국인들의 묘지가 묻혀 있었다. 이는 원래 중구 북성동, 답동 등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곳에는 인천에서 무역상으로 활동하며 많은 이익을 챙긴 세창양해의 헤르만 헹겔, 타운센드 상회의 월터 타운센드, 청국 외교관 출신으로 오늘날 인천세관의 전신인 인천해관에서 일을 했던 오례당 등의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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